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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3026
글쓴날 : 2002-06-06 08:30:30
글쓴이 : 보스코프스키 조회 : 3469
제목: '군대 해체'를 상상하자-한겨레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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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노자의 북유럽탐험 ]

2002년01월09일 제392호 


‘군대 해체’를 상상하자

‘군 해산’ 놓고 국민투표까지 한 스위스… 세계에 무장해제의 시기는 올 것인가


사진/ 훈련하는 스위스의 군인들. 정신교육이나 체벌 같은 병폐가 없지만 '군대해산 요구'가 두번이나 국민투표에 올랐다.(GAMMA)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진보세력의 도전을 받아보지 않은 사회제도나 조직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자본주의와 불평등한 세계질서를 부정하는 ‘정통’ 좌익, 국가 그 자체를 부정하려는 아나키즘 운동, 국가의 구체적인 억압적 장치들(예컨대 국가보안법) 등을 철폐하고자 하는 각종 민중운동들도 한국 근·현대사에 그 발자취를 남겼다. 그런데 비판의 대상은 자주 됐으면서도 부정되거나 철폐의 요구를 받아본 적이 없는 국가장치가 하나 있다. 바로 군대이다.

한국 평화운동의 태생적 한계

군대에 대한 각종의 비판이야 민간인 학살로 얼룩진 6·25 전쟁 때부터 베트남전 때의 한국군 만행들이 밝혀진 최근까지 수없이 제기돼왔다. 군비축소 없이는 아직도 고질적인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육과 같은 분야의 질을 선진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적어도 진보계에서 이미 진부한 진리가 된 지 오래다. 군사문화가 현재의 상명하달식의 사회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 또한 진보를 자처하지 않는 사람들도 대개 인정한다. 그렇게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확산됐음에도, 한반도에서는 가장 열렬한 평화주의자들도 ‘국방 무용론’이나 ‘군대 해체론’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 1차적인 원인은 분단체제로서의 한계와 중국·일본 군사대국화의 문제가 될 것이고, 2차적인 원인으로서는 애당초부터 ‘부국’과 함께 ‘강병’을 강조했던 한국 근대 엘리트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특성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결국 나라의 양쪽 지배층들이 한반도의 젊은 남성들에게 총을 들게 하고 무장시킴으로써 각자의 억압체제를 강고히 하는 상황에서, 필자를 비롯한 이 상태를 타개하려는 이들도 분단체제 안에서의 평화운동의 태생적인 한계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의 필자의 가장 반가운 발견 중 하나는, 한국에서는 거론조차 하기 어려운 ‘군대의 전면적인 부정’이 진지한 토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1천명의 시민당 15명이 현역군인이 되는 한국에 비해 군사 인구의 비율이 1천명당 5명이 재향·현역군인인 스위스에서, 2001년 12월2일에 이색적인 국민투표가 시행됐다. 투표의 다섯 항목 중 두 가지는 매우 빠르게 세계적 뉴스토픽이 됐다. 하나는 세계 투기자본가들 사이에 한때 상당한 긴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스위스 노총이 제안한 일체 자본·증권 거래에 대한 20%의 일률적 세금징수안이었다. 투기자본의 전횡을 막으려는 이 제안이 만약 국민투표에서 통과됐다면, 반세계화 운동의 중요한 요구사항이 관철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의 이목을 끈 두 번째 항목은 스위스 군대의 해산안이었다.

물론 주위의 인접 국가 중에서 이렇다할 만한 가상적(假想敵)이 전혀 보이지 않는 스위스에서야 가능하다고 남의 일로 취급하기 쉬운 소식이다. 그러나 영구 중립국으로서 나토에 가입하지 않아 유사시에 외부로부터 보호받기 힘든 스위스에서, 이와 같은 제안이 10만명의 유권자들의 지지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에까지 상정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1989년에 이미 똑같은 군대 해산안이 국민투표의 대상이 됐던 일까지 떠올린다면, 군대의 전면적인 부정이 스위스 국민토론의 중요한 테마가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파적 자유주의자들도 “해산” 요구


사진/ 1천명당 15명이 현역군인인 한국에 비해 스위스는 1천명당 5명이 재향·현역 군인이다.(GAMMA)


군대가 있어도 가상적에 대한 적개심을 주입시키는 정신교육이나 체벌과 같은 병폐 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스위스에서 왜 구태여 군대를 해산하자는 소리가 계속 들리는가? 예상 밖으로 군대의 해산을 요구하는 한축은, 다름 아닌 우파적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의 논리는,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맹주국의 군사력만으로도 주변부의 움직임을 충분히 견제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군사예산이 세계군비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미국이 60여개국에서 주둔하고 있는, 극단적으로 일극적(一極的)인 현재의 세계에서 왜 하필이면 적대세력들의 침공에 대비해 그 아까운 돈을 낭비해야 하느냐는 것이 이 논리의 골자다.

물론 이같은 논법의 뒷받침이 되는 것은, 주변부 세력들이 침공자가 될 수 있는 반면에 핵심부 세력 사이의 갈등이 언제나 평화적·합법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전제다. 그러나 좌파의 군 해산 논리는 돈타령과 미군의 위력에 대한 확신을 출발점으로 삼는 우파와는 다르다. 좌측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무엇보다도 징병제의 억압적인 성격이다. 군 복무 자체보다도 스위스 재향군의 야단스러운 정규 훈련은 스위스 주민들에게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어서, 많은 스위스 시민들이 노골적으로 “재향군 훈련을 피하기 위해서 외국에서 거주하려 한다”고 말한다. 훈련 기피자들을 단속하는 스위스 경찰의 태도도 전설적이다. 합법적으로 외국에 나가 살다 회의 참석차 스위스에 입국했다가 호텔에서 엉뚱하게 ‘훈련 기피죄’로 붙잡혀간(우연히 스위스에서의 회의날짜와 옛적 재향군 훈련기간이 같았다) 스위스 기업가 이야기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됐다. 또한 스위스 시민의 집집마다 자동총이 보관되고 있는 스위스 생활의 풍속도는 일체 무기를 흉기로 보는 좌익의 평화주의자들에게는 살벌해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위스를 유럽의 주요 국가 가운데 ‘군대없는 국가’의 선구자로 만들 수 있었던 ‘군대 해산안’에 대한 투표는 이번에도 부결로 끝나고 말았다. 1989년에 36%의 유권자들이 군대 해산을 지지한 데 비해 이번에는 지지율이 21%에 그쳤는데, 미국의 아프간 침략이 만들어낸 전세계적인 광적 분위기에서, 시들고 있었던 안보의식이 다시 일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부결됐다고 해서 국민투표 자체를 허사로 보면 안 된다. 군대 해산안이 강력하게 제기된 바람에 군비축소 효과가 상당히 있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사병, 연봉이 2300여만원

노르웨이에서 군대 해산의 아이디어는 냉전 종식 이후 지금까지 늘 정치계의 화젯거리이다. 냉전시대에는 ‘소련 침공의 위험’이라는 명분이 있어 지지를 받아온 노르웨이군은 소련 몰락 이후 소련의 침공 위협을 덜게 되었다. 물론 “구소련지역의 정치적인 불투명성과 예측불가성, 사회적 혼란의 위험성” 등으로 당분간 군대의 수명을 늘릴 수 있겠지만, 푸틴의 보수적인 국가자본주의적 체제가 점차 강화됨에 따라 큰 설득력을 잃게 될 것으로 보인다. 연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내내 군대를 해산시켜 노르웨이를 아이슬란드처럼 ‘군대없는 북방의 국가’로 만들자는 유권자는 대략 17%에 달했다. 우파 정치인들은, 군대를 해산시키는 대신 나토 기부금을 늘려 안보분야에서 나토에 의존하자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노르웨이군의 기존 전략이 어차피 “침공을 며칠 동안 저지하며 나토 구원군 도착을 대기함”을 골자로 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면, 그렇게 놀라운 발상은 아니다.

이에 반하여 노르웨이 9개당 중 4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 좌익당은 나토를 비판적으로 보고, 스칸디나비아 국가 사이의 군사협력의 강화와 국군 해산, 그 이후의 공동 ‘스칸디나비아 병력’의 창립과 구소련에 대한 적극적인 원조와 지원을 통한 전쟁발발 위험의 봉쇄를 제시하고 있다. 방향이 서로 다르지만, 일국 국방이라는 것이 요즘 세계에서 무용하다는 의식이 상통한다. 군 해산에 대한 적극적인 토론의 결과로 정부는 2005년까지 2만5천명이었던 병력을 5천명으로 감축하는 대대적인 군축을 하기로 했다. 또한 최장기인 1년의 군 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일 경우에는 평시의 재향군 훈련을 일체 면제해주고(참고로 기혼자의 군 복무 1년간 총수당은 약 2320만원) 4개월의 단기간 복무를 선택하면 재향군 훈련의 의무를 예전대로 부여하겠다는 것인데, 군 복무 기간이 4개월까지 줄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지금 한반도의 상황에서는 비현실적인 군 해산…. 그러나 통일이 되고 한반도의 영구 중립화가 가능해진다면 군 해산의 가능성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아직까지 단꿈처럼 들리는 이야기지만 지난 50년 동안 군에서 희생된 수만명의 생명과 군비로 낭비돼버린 부지기수의 국부(國富)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이기도 하다.

박노자/ 오슬로 국립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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