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찬-벌거벗은 공권력 2002. 1. 22 

오랫동안 뜸했다. 
지난해 12월 초에 사내 체육대회에서 오른쪽 정강이 뼈에 금이 가는 골절상을 입고
전치 ８주의 진단을 받았다. 3주일간 꼼짝없이 누워있다가 새해부터 목발을 짚고
출근한다. 편집국 축구부 부동의 스위퍼 (물론 축구부원들은 인정하지 않지만) 인
나는 지난 몇 년간 각종 경기에서 저지른 반칙과 더티 플레이의 업보를 한꺼번에
받은 것이라 여긴다. 

혹자는 '발보다 입으로 축구를 하기 때문'이라며 혹평했지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알리라. 그라운드에서 쓰러질 지언정, 때로 실력보다 열정이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축구라는 사실을. 여튼 덕분에 뉴스메일이 늦어졌다. 때늦은 감이
있지만 집회시위 이야기를 오늘은 마무리하겠다.

대선을 앞둔 올해는 각 집단의 시위·집회가 무성할 것으로 보인다. 몇몇
언론에서는 이를 미리 감지하고 예의 '올바른 시위문화'를 내건 시리즈 기사까지
지난해 연말에 내보냈다.

지난 11일에는 경찰이 '사소한 위법행위도 엄벌하겠다'는 방침까지 밝혔다. 이른바
'불법·폭력시위'를 배격하자는 건데， 나에게는 80년대 이후 단 한번도 변하지
않은 '집회 컴플렉스'의 또다른 변형판으로 보인다.

그러면 도대체 불법시위는 어떤 것인가? 우선 집회·시위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헌법 조문부터 살펴보자.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이상이 헌법 제21조다. 모든 국민에게 집회의 자유가 있고 이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한동안 눈 감고 이 조문을 몇차례 음미해주시기
바란다. 

헌법은 우리의 생각보다 매우 오묘하고 아름다와서 그냥 단어 뭉치들이 아니다.
국회사무처 인터넷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헌법 조항별 설명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집회의 자유에는 집회의 장소, 집회의 시간, 집회의 방식, 집회의 내용에 대한
자유가 포함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유는 '무제한의 자유'가 아니다. 

다른 기본권과 충돌할 경우, 이를 적절히 법에 의해 조정할 수 있다는 게 현대법의
정신이다. (그러나 법에 의하지 않고, 대통령령 등의 하위법규에 따르거나
공권력의 임의적 판단에 따라 이를 처벌하거나 가로막는 행위는 안된다는 것 또한
현대법 체계다)

이를 위해 헌법의 기본권을 현실 속에서 조정할 법률이 필요하다. 이 경우,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이 그 준거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 역사를 살펴보면
재밌다. 집시법 제정과 개정의 역사는 '집회시위'에 대한 권력의 편협성을 그대로
반영한다. 

이 법의 뿌리는 1910년 8월 제정된 '집회취체령'이다. 일제가 왜 이를
만들었는지는 불문가지다. 이후 광복직후인 1948년 4월에 이 법령이 폐지됐다가,
4·19 직후인 1960년 7월 집회시위의 신고제를 법률로 정했다.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이 법은 군사쿠데타와 함께 이듬해인 1961년
9월, 모든 집회를 금지하되 체육· 오락· 이재민구호· 재건국민운동 등 비정치적
목적의 집회는 신고제로 하는 '집회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대체됐다. (말 그대로
2명만 모여도 잡혀가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 뒤 임시조치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1962년 12월 지금의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령이 제정되고, 무려 37년간 조금의 변화도 없이 그대로 유지됐다.
현행 집시법은 지난 89년 3월 일부 개정된 것이다.

그러니까 집회시위법은 일제가 만들어 광복과 함께 사라졌다가 4월 혁명 직후에
등장해 5.16 군사쿠데타 이후와 87년 6월 항쟁 및 88년 노동자 대투쟁 직후에
개정된 것이다. 어떤 식으로건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제한'하려는 의도가
드러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런 역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우리의 집시법은 충돌하는 기본권을 '조정'하려는
목적을 애초부터 포기하고, 아예 집회시위와 관련된 기본권을 '제한' 하는데만
충실해 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불법시위' 논란은 원천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헌법과 실정법의 커다란 간극을 방치한 채,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몰아놓고,
올바른 집회시위문화가 필요하다고 뒷북치는 것은 실상 집회시위를 아예 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현 집시법을 기준으로 할 때 어떤 경우가 불법시위인가 그 수많은 사례
가운데 일부만 적시하면 이렇다.

1. 대학 구내 광장이건, 노천극장이건, 벤치 앞이건, 강의실이 아닌 대학 공간에서
2명 이상이 모여 벌이는 '정치적' 행사는 모두 불법이다. 

- 현행 법은 천장이 없거나 사방이 폐쇄되지 않은 장소에서의 펼치는 옥외집회의
경우, 반드시 관할 경찰서에 사전 신고하도록 하고 있다. 이 규정에 따르면 대학
캠퍼스 대부분의 공간은 물론, 동대문 운동장에서 사회단체가 행사를 열어도
관할서에 사전신고(사실은 사전허가) 절차를 밟아야 한다. 당연하게도 운동장에는
`천장'이 없다. 

- 실상은 대부분의 학생회 행사들이 당국의 간섭없이 열리고 있지만, 실정법은
언제든 이를 문제삼을 수 있다. 이 규정은 사람들이 전혀 접촉할 수 없도록 천장과
사방이 닫힌 공간에서 '자기들끼리' 떠들지 않는 한, 국토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종류의 '회합'을 사전에 검열해 금지통보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다.

- 최소한 옥외집회에 대한 규정을 현실화시켜, 대학구내나 운동장 등 '자발적'인
참석자가 아니면 집회의 영향을 받을 수 없는 공간에서 열리는 행사는 신고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게 시민단체들의 지적이다.

2. 앞으로 3개월간 용산 미군기지 앞의 모든 시위는 불법이다.

- 이 장소에 자유시민연합이라는 단체가 앞으로 3개월간의 집회신고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최근 미군주둔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어 논란을 빚기도 했는데,
그 집회를 실제로 개최하건 아니건 다른 단체들은 이 근처에 얼씬도 할 수 없다.
같은 장소에서 두가지 이상의 집회를 열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다. 

- 이처럼 플랭카드를 펼치는 즉시 불법집회가 되는 장소가 한두곳이 아니다. 명동,
종로, 광화문 곳곳에 열리지도 않는 유령집회가 얼마나 많은 지는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서울경찰청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그 날의 신고된 집회시위 일정을 찾을 수
있는데, 신고된 시간과 장소를 찾아 가보면 정작 집회는 열리지 않는다.
시민단체들은 이런 유령집회의 상당수가 관할 경찰서가 각종 관변단체나
상인단체를 '사주'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 원래 이 규정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는 시위군중의 충돌을 사전에 막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시민사회단체의 집회를 막기 위해, 그 장소에 다른
단체의 집회를 장기신고하는 방식으로 변질돼 운용되고 있다. 집회가 열리지도
않는 곳에서 멀쩡히 평화집회를 해도 불법인 것이다. 

3. 민주노총이 주최하는 모든 집회는 금지될 수 있다.

- 민주노총이 이른바 '폭력집회'를 연 경력이 있기 때문이란다. 현행 집시법 5조는
집단적인 폭행, 협박, 손괴, 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한 집회 또는 시위는 금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동안 언론이나 당국에 의해 민주노총이 폭력시위를 벌인 것처럼 알려진 경우가
한두번인가. 지금까지 일어난 물리적 충돌의 과정과 연유가 어떻든 간에 경찰은
언제든지 '공공의 안녕질서'를 이유로 이들의 집회를 금지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러하다. 

- 문제는 이 법규정이 공공의 안녕질서라는 매우 모호한 개념을 준거로 사실상
집회금지의 권한을 무한히 확대하고, 그 판단의 주체도 일선 경찰에 내맡기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범죄적 상황의 발생을 '예단'해 사전에 헌법상의 권리를
속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형기를 마친 사람의 시민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이 모두
부당하듯이 '어쩌면 저들이 폭력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누군가의 판단에 의해
집시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속박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시민단체들은
최소한 죄형법정주의와 명확성의 원칙에 따라 금지조항을 구체화시켜 자의적
해석의 가능성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4. 신고내용과 조금이라도 다른 내용의 집회는 모두 불법이다.


- 집회나 시위를 개최할 경우, 관할 경찰서에 제출해야 될 이른바 '신고사항'은
이렇다.

목적, 일시, 소요시간, 장소 / 주최자, 연락책임자, 질서유지인의 주소, 성명,
직업 / 집회참가 발언자의 주소, 성명, 직업 / 참가예정단체 및 참가예정인원과
시위방법(진로 및 약도 포함). 이밖에도 집회에 사용할 기물과 도구도 함께
신고해야 한다. 솔직히 신고서 쓰는데 질려서 집회를 아무나 열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그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 이런 법규정의 원래 취지는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할경찰관청에 집회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해 집회 개최에 따르는 경찰의
주변 질서유지를 위한 협력을 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까다롭고 불필요한 신고사항을 요구한 뒤, 실제 집회 현장에서
신고사항과 조금이라도 다른 내용이 적발될 경우 바로 해산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악용되고 있다. 신고된 참가자보다 수가 많다거나, 오후 4시에 끝내기로 해놓고
벌써 10분 지났다거나 머리띠는 신고된 집회기물에 없었는데 있다거나 하는 식의
트집이 언제든 가능하다. 

4. 높으신 분들이 기거하는 주변에서 모든 집회는 불법이다. 

- 현행 집시법에 따라 그 주변 100m 이내의 장소에서 집회를 할 수 없는 주요
공관들을 다음과 같다. 국회의사당, 각급법원, 헌법재판소, 외국 외교기관,
대통령관저, 국회의장공관, 대법원장공관, 헌법재판소장공관, 국무총리공관,
국내주재 외국외교사절의 숙소 등이다.

- 덕분에 광화문 일대의 주요 건물이 외국대사관을 유치해 주변을 온통 집회시위
금지구역으로 만든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문제는 이런 경우다. 국세청에
항의하는 집회가 국세청 건물에 외국대사관이 입주해 있다는 이유로 금지시킨다.
그 대사관에 위해를 가할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는 데 말이다. 

- 이밖에 주요도로 주변의 집회 금지 등의 폐해는 앞선 두차례의 글을 통해 이미
지적한 바와 같다.

요즘은 데모 때문에 장사를 못하겠다는 도심상인들의 볼멘 목소리가 집회시위
문화를 성토하는 당국과 일부 언론이 인용하는 주된 근거다. 그러나 이를 빌미로
'여론몰이'하듯 모든 집회를 불온시하는 행태는 잘못된 것이다.

집회·결사의 자유가 기본권의 하나로서 헌법상 보장되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① 집회 또는 결사를 통하여 개개인이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의견을 교환하고，
집단적으로 공통의 의견을 형성 또는 확인하며, 나아가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인간 본래의 자연적인 행동양식이기 때문이다.
② 집회 또는 결사는 정치문제에 대한 개개인의 사상·의견의 표현수단으로서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③ 사회의 지배체제 내지 지배질서에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소수의견의 표현행위에
대한 공권력의 간섭이나 제한을 배제하는 것이, 소수자의 인권과 이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법률과 달리 집회시위법은 정부수립 이후 단 한번도 그 취지와 정신에 걸맞는
내용을 담을 제대로 된 컨센서스가 이뤄진 적이 없다. 하다못해 시민사회단체와
정부당국, 필요하다면 도심상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존중하며 지키는 실정법을 제정을 위해 논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사회적 합의'에 의해 마련된 법률에 있고 나서야, 우리는 이른바 '불법'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불법의 이름으로 집회시위자유를 가로막는 곳곳에서 헌법의
이름으로 지켜져야 할 기본권은 누더기가 되고 있다.

찢어발겨진 그 권리 위에 잠자는 국민들이 있는 한, 법치주의는 벌거벗은 공권력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여론매체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